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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온 편지] 선조, 임진왜란 당시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후기자 2019. 6. 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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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 '과거에서 온 편지'는 후기자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의 입장에서 '왜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을까'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사실 바탕) '창작글' 임을 밝혀드립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편지가 발견되었다.

과거에서 온 편지 - 선조

짐은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이니라.

"짐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가?"

허나 아직은 그런 말을 삼가 한다. 짐이 미안하다고하면 백성들은 나라의 미래를 내다볼 것이고 더 이상 나라의 희망이 없다 생각할지어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써 체통을 지키라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으나 짐도 인간인지라 후손들에게나마 해명의 글을 이렇게 몰래 적어본다.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있고 신하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꼬. 짐은 명종께서 후사가 없이 돌아가시자 중종의 손자(셋째)라는 이유만으로 16살에 즉위하였다.

그 나이에 권력을 가지고 싶단 생각도 하지 못했고 권력을 행사하는 법도 단연 알지 못했다.

열여섯 살에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짐은 즉위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해야만 했다. 이는 어느 나라의 백성들도 부러움 살 나라를 만들고자 함이었고 방법을 모르는 나머지 매일 책에 의존했던 게 생각이 난다.

"지금도 책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있는가?"

짐의 친구는 책이었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사귀어야만 했던 친구였다.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토론도 빼먹지 않았고 선대인 중종, 인종, 명종의 전례를 거울삼아 훈척세력을 정계에서 모두 밀어내고 지방의 근거지를 두고 있던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기용해 왕권강화를 도모하게 만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짐은 자만하기 짝이 없었다. 권력을 한번 휘두르니, 하고 싶은 대로 이루어졌고 한 번 더 휘두르니 하늘은 밝아졌기 때문이겠거늘.

한번 휘두른 채찍질에 문제가 생겼는지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던 사림세력간의 싸움이 일어나버렸다. 다시 훈척세력을 불러들일 수도 없는 일이고 진압을 하지 못한 채 내부의 불씨는 점점 더 커지고 말았다.

짐이 왕권을 강화한 이유는 태생적인 한계와 약점을 지니고 시작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왕권을 아무리 강화한들 이 약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잘해야 신권세력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의거를 관철하는 방법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로 세자책봉문제가 있다. 짐에겐 14명의 아들이 존재한다. 명종께서 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문제가 찾아오고야 말았지 뭔가.

짐이 책봉을 하지 않고 죽으면 이 14명간의 피바람이 분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이 나라를 맡길 인재는 아무리 내 아들들이지만 마땅히 없어서 미뤘거늘.

대신들에게 짐이 옥채를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한다는 오해도 샀지만 실은 말 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하였다.

세자책봉문제에는 대신들이 관여를 많이 했고 이 문제는 세력과 크게 밀접된 것으로 짐은 신경이 곤두섰고, 계략인지 허위인지 모르지만 언급된 자를 죽일 수밖에 없음을 이제야 비로소 전한다.

덕분에 분당사태로 조정은 매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북쪽에서는 야인들의 변경 침입이 잦았고 남쪽에서는 왜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590년, 짐은 통신정사 2명을 왜구에 파견했고 2명중에는 서인과 동인으로 나누어졌다. 서인인 황윤길이 보고하길 "왜국이 전쟁준비에 한창"이라고 한 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다"는 상반된 보고를 받았다.

당시에 동인 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황윤길의 보고는 짐은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동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예상하고 우려했던 1592년 4월 임진란이 일어났다. 조선개국 200년이 되던 날, 왜국이 축하해주러 온 것이 아니라 비수를 꽂으러 온 것이다.

곳곳에서 패전소식이 전해왔고 짐은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야만 했다. 짐이 생각하는 통치자는 악착같이 살아남아 죽은 신하와 백성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으며, 통치자인 짐이 죽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짐은 장군들처럼 결사항전하지 못한다. 일국의 왕으로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 조선왕조가 '나'로 인해 끝이 난다면 선대인들을 볼 낯이 없다.

때마침, 명나라 원군과 이순신 공의 활약으로 왜군의 기세가 꺾이고 일본의 침략전쟁은 완수를 하지 못한 채 7년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백성들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이순신 공, 김덕령 공, 곽재우 공들과 짐을 비교했다.

충신들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도, 짐도 이 자리에 없었겠지만 그 인기는 그 누구도 시샘이 안날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게 해코지를 한 것도 있지만 이는 다 짐의 그릇이 작기 때문이다.

처음엔 정말 잘해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 나라까지 빼앗길 뻔했다. 이 잘못은 짐에게 있다. 처음부터 가졌던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나라의 대표자로서 자격도 없지만 믿고 따라와 준 백성들, 신하들에게 이 나라의 국왕으로서 미안하고 후에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위인이 되지 못해 부끄러운 뿐이다.

후손들이 이 글을 보고 나를 무능한 왕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깨달아 주었으면 한다.

"외부전쟁보다 내부전쟁이 무서운 것이다."

짐이 못난 것은 이 글로도 증명이 된다. 얼마나 못난 것은 후손들이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를 인정하오니 비판은 되도록 삼가 해주었으면 한다.

짐은 좋은 임금이 되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한 짐은 세자책봉이라 택했고 좋은 인재를 뽑을 생각에만 있었다.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자식에게 미루는 것. 지금생각해보면 아주 나쁜 것이다. 싫어하는 책을 매일 보던 악몽은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미래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다면 꼭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싶다.

그런 세상에 이 땅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면 그들의 국왕님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성은이 망극 하옵나이다."

- 1607年 11月 27日 宣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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