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18민주화운동 39주년입니다. 39년 전 오늘, 광주는 어땠을까?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끌려가 폭행당하고 죽고...........
'믿기지 않는 역사'
이민오(당시 조선대 의과대학 4학년) 원장님과 이정융(당시 광주국군수도병원 진료부장) 원장님을 통해 <80년 광주의 오월>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 포스팅에 앞서 오늘이 5월18일인 만큼 제대로 알고 갑시다.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게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학살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던,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입니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저는 5·18 민주화운동이라 적는답니다.
또한, 한가지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계엄군이 시민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만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진실도 알지 못했던 시대의 희생자이기 때문입니다. 1차 책임은 계엄군이 아닌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과 군정에게 있습니다. 계엄군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시민 학살을 지시한 장본인이 범한 중죄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짓이 절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대학생도 아니고, 당시 고교생이었던 분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참고로, 이분은 5·18 최초 총상자입니다.
“친구들과 하굣길에 인근 포장마차에 가방을 맡겨놓고 시위대에 합류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이었던 김영찬(56)씨는 1980년 5월 광주를 이같이 회상했다.
1980년 5월19일 평소처럼 등굣길에 나선 김씨의 눈앞에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공수부대의 1인용 삼각군용텐트가 조선대 운동장을 뒤덮고 있었던 것.
김씨는 “당시 상황은 대학교인지 군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며 “이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날 학교 측도 계엄령으로 인해 오전 수업만 진행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이른 시간 하굣길, 그와 친구 3명은 당시 시위로 차량운행이 중단되자 집까지 걸어서 귀가하던 중 계림동 로타리에서 시위대에 합류했다.
김씨는 “당시 고등학생 때라 민주주의 그런 사상은 없었지만, 젊은 혈기의 군중 심리로 인해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씨는 “계엄군이 최초 발포한 것은 21일이 아닌 19일”이라며 “총상을 입어 1년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이를 몸이 증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날 오후 3시께 구호를 외치다 말고 청년들이 짚단에 불을 붙여 어디론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계림동 광주고 앞길로 이동했다. 그가 이동한 장소에는 장갑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로 있었다.
김씨는 “자신도 모르는 새 이들 틈에 끼어 맨 앞에 서게 됐다. 이때 장갑차에서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총구가 튀어 나왔고 하늘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고 전했다.
그때 한 어르신이 “공포탄이니까 놀라지 말고, 겁먹지도 마라”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 많던 시민들이 총소리에 겁을 먹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같이 온 친구들 역시 뒤편에 빠져 김씨에게 “위험하니 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씨가 친구들 쪽으로 이동하던 중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성이 울린 뒤 김씨는 갑자기 하체에 힘이 빠져 그대로 도로에 쓰러졌다.
김씨가 다시 정신이 든 것은 사흘 뒤인 21일이었다. 그는 전대병원에 수술을 하고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당시 의료진을 통해 자신의 몸에 박힌 총알 3발을 제거했다. 이후 김씨는 1년 동안 전남대병원에서 7번의 대수술을 거쳤다. 장이 관통돼 꼬임 문제로 장 일부분을 잘라내고 다시 잇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김씨는 “나는 총을 빨리 맞아서 수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 총상을 당한 사람들은 수술조차 할 수 없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분들이 많았다”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끝으로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지만 제 몸이 그날의 오월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5·18민주화운동 39주년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혹, 가시는 분이 있다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꼭 숙지하고 가시길 바랍니다.
분명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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